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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비문학

빈 서판 _ 스티븐 핑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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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동안 이 책을 다 읽는데 실패했다. 최초로 독서모임의 모든 멤버들이

완독에 실패할 정도로 쉬운 책이 아니었다. 양도 양이지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장이 하나 없고

계속해서 새로운 정보들이 쏟아져 나와 도저히 속도가 나질 않았다.

결국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적당히 넘길 건 넘기자

하고 타협을 봤다.

 

중간 분량을 지났을 때 쯤 부터 파트를 골라서 읽었다.

모든 내용을 다 탐독하려는 욕심을 냈다가는 제 풀에 지칠까봐 내가 내린 타협점이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모든 파트를 다 읽지도 못했고)

이 중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던 핵심 부분을 다시 되짚어 보고자 한다.

 

 

빈 서판:

['인간의 마음은 백지와 같다. 고로 한 인간의 성격과 행동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경험과 환경이다.' 라고 주장하는 극단적 경험주의]

 


개요

 

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저자는 각 장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한 문단으로 정리한다.

이 문단만으로 스티븐 핑커가 굉장히 객관적인 논리를 펼치려는 것을 예상 할 수 있다.

 

1 현대 지식 세계를 지배하는 빈 서판의 위력과,

그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인간 본성과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점들

2 이 도전으로 야기된 불안을 관찰

3 그 불안이 어떻게 해소되는지에 대하여

4부 보다 풍부한 인간 본성의 개념이 언어, 사고, 사회 생활, 도덕성에 어떤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는가

5부 그것이 정치, 폭력, , 육아, 예술에 관한 많은 논쟁들을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는가

6부 빈 서판의 소멸이 최초의 우려만큼 불안하지 않고

어떤 측면에서는 혁명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을 입증

 

6부에서 스티븐 핑커가 빈 서판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책을 집필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중용

 

웬 갑자기 중용이냐 하겠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스티븐 핑커가 논지를 펼치면서 한 쪽으로 쏠리지 않고 계속 중용을 유지하는 모습이었다.

 

스티븐 핑커는 빈 서판옹호론자들을 계속해서 비판하는데

이는 결코 스티븐 핑커가 빈 서판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빈약한 논리로 빈 서판을 주장하는 지 꼬집는 것이다.

 

(맥락이 생략된)한 주장이 어떤 식으로 악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거듭 주의할 것을 강조하고,

이것 아니면 저것, 흑백논리 식의 사고방식

(인간 본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환경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

을 경계할 것을 끊임없이 책에서 반복한다.

 

예를 들어 빈 서판 주의자들은

인간을 유전자로 설명한 리처드 도킨스를 환원주의자, 결정론자로 취급한다.

실제로 도킨스의 글에는 (인간의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따위의)그런 의미를 암시하는

주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의 다양성을 설명할 때는 유전자보다 환경이 강함을 강조하기까지 했다.)

빈 서판 주의자들을 그의 글을 잘못 인용하고 그를 오해하게 만든다. 

 


환원주의 :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상(事象)이나 개념을

단일 레벨의 더 기본적인 요소로부터 설명하려는 입장]

 

어떤 대상을 이해하려면 그 대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품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역으로 각각의 구성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안다면

그 대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환원주의의 핵심이다.

 

어떤 사람이 인간 특성의 일부를 유전자로 설명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인간=유전자라고 말하는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빈서판 주의자들이 도킨스를 공격하며

어떤 오류를 저질렀는지 쉽게 비유한다.

 

“0보다 큰 확률을 100퍼센트의 확률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빈 서판의 완강함이 엿보인다.

선천성 0만이 용인될 수 있는 믿음이고 0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모든 확률을 동일하게 취급된다.”

 

그들은 도킨스의 인용문을 가져오며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유전자)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사실 도킨스가 실제로 쓴 글은

“그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였다.

 

맥락을 생략하고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심지어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인용문을 잘못 끌어다쓰는 오류를 저지르는지

저자의 강조가 한 번더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쯤에서 나도 한 번 반성하게 된다.

나도 이기적 유전자를 읽었을 때 인간은 결국 유전자의 집합체구나,

유전자를 위해 사는구나하는 불균형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인간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유전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것을 도킨스는 설명했을 뿐인데 유전자가 100% 인 것 마냥 받아들인 것이다.

 


인간 본성을 둘러싼 올가미

 

“다수의 사람들은 인간 본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인종 차별, 성 차별, 전쟁, 탐욕, 집단 학살, 허무주의, 정치적 변동,

아동과 소외 계층에 대한 무관심을 시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에 어떤 선천적인 구조가 있다는 주장을

틀릴 수도 있는 하나의 가설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말아야 할 비도덕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면 어떤 끔찍한 일이라도 일어나는 것일까?

 

인간 본성이란 개념에 도덕적, 정치적 올가미를 씌워

그것이 현대에는 위험한 개념으로 변질되어버렸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큰 게 문제다!'

'내가 사랑을 못 주는 것은 못 받아봐서 그렇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빈 서판 이론이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된 건 다 환경 탓이니까 말이다.

 

“진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 놓여있다.”

 

그는 극단적인 유전자 옹호론자도 아니고 극단적 문화 경시자도 아니다.

다만 그는 환경이 혹은 문화가 전부다라는 극단적인 입장이 종종 온건해 보였고,

온건한 입장이 어떻게 극단적으로 몰렸는가를 탐구한다.

 


문화와 환경을 전부처럼 떠받드는 사회가 낳은 부작용

 

인간 본성에 대한 부인은 학계 밖으로까지 확산되어, 지적 생활과 상식이 단절되는 결과까지 나타났다.

....

그들은 어린 소년들이 다투고 싸우는 것은 그렇게 하도록 외부에서 조장했기 때문이고,

아이들이 단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야채를 먹는 데 대한 상으로 부모들이 단 것을 주기 때문이고

....

인간 본성에 대한 부인은 일반인들의 삶에도 피해를 입히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점토처럼 반죽해 낼 수 있다는 이론은

부모들에게 부자연스럽고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양육 체제를 강요해 왔다. ....

모든 악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은

무고한 사람들을 순식간에 살해할 수도 있는 위험한 정신병질자들의 석방을 정당화하였다.”

 

그렇다.... 요즘 사회를 보면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무조건적인 부모의 잘못된 교육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가 잘못 크면 다 부모님 잘못이라고.

 

이 시선들이 부모들에게 얼마나 큰 압박과

자책감을 가져오게 했을까? 

만약 정말 부모가 가르치는대로 아이가 그대로 큰다면 

인간은 태어날 때 말 그대로 빈 백지 상태여서 

유전자의 기능은 제로고 오로지 흡수하기만 한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는 당연히 말이 안 된다.

유전자의 기능이 없으면 어떻게 학습을 하고 흡수를 한단 말인가?

왜 누구는 빨리 습득하고 바른길로 나아가며

누구는 어떻게든 삐뚤게 생각하고 

습득 능력도 느리단 말인가?

 

유전자의 영향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고상한 야만인 :

 

[자연상태의 인간은 욕심이 없고 평화로우며

탐욕, 근심, 폭력과 같은 병폐는 문명의 산물이라는 믿음]

 

루소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다. 인간이 악함은 다 문명의 산물인 것이다.

홉스

인간의 삶은 외롭고 가난하고 더럽고 짧다.

이 지옥같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자치권을 군주나 지배 집단에게 넘겨주는 것.

 

인간이 고상한 야만인이라면 리바이어던의 횡포는 불필요해진다.

인간이 고상한 야만인이라면 행복한 사회는 우리의 생득권이 된다.

인간이 선천적으로 추악하다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경찰과 군대에 의해

유지되는 불안한 휴전뿐이다.

 

두 이론(루소와 홉스)은 사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아이가 야만인으로 태어나고 야만인이 선천적으로 온화하다면,

양육의 핵심은 아이들에게 잠재력 개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되고,

악한 사람은 그들을 타락하게 만든 그 사회의 산물이 된다.

 

야만인이 선천적으로 추악하다면

양육은 규율과 투쟁의 장이 될 것이고,

악한 사람은 제대로 길들여지지 않은 어두운 측면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 된다.

 

"우리는 자연적인 모든 것(자연식품, 자연의학, 자연분만)을 존중하는 경향에서,

인위적인 것을 불신하는 경향에서, 권위적 방식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거부감에서,

그리고 사회적 문제들을 인간 조건에 고유한 비극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제도적으로 개선이 가능한 결점으로 이해하는 경향에서 그 영향을 보게 된다."

 


정리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 이 질문부터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내가 작은 분량이나마 읽고 느낀 것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지와는 상관없이

인간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나쁜 일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본능을 인정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빈 서판을 옹호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유전자의 기능을 싸그리 무시하고 인간이 오직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인간은 유전자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모두 틀렸다.

 

어느 한 쪽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인간은 유전자에 의해 태어나고 유전자에 따라 학습 능력과 성장 속도가 달라진다.

하지만 그 학습 능력과 성장 속도 또한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균형을 유지하고 양쪽 입장을 적극적으로 살펴보아야

자신이 지지하는 쪽의 이유와 논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말 할 수 있다.

 

아직 얼마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아프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새로운 정보들이라 뇌가 따라가기 힘들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음미하며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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