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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비문학

엄마의 독서 _ 정아은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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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이 이야기는 애당초 엄마로서의 내 삶을 정리해보기 위해 

틈틈이 썼던 소소한 기록에서 출발했다."

 

"엄마라는 막중한 타이틀을 달게 되면서 나는 늘 그런책을 쓰고 싶었다. 

'엄친아'를 키워낸 완벽한 엄마가 다른 이들에게 비법을 전수해주는 책이 아닌,

어떻게 해야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전문가들의 책이 아닌,

당사자의 경험이 새겨진 진솔한 책.

자신이 했던 실수와 못난 성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을 아낌없이 공유해주는 책."

 

정은아 작가는 14년 차 경력(2018년 기준)의 아들 둘 엄마다.

그는 자신 스스로를 대한민국 엄마들의 평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극성스러움과

강박에 가까운 사교육을 향한 열망을 가졌던 엄마라고 말한다.

 

그는 아이를 키우는 것은 '방향을 알 수 없는 정글을 영원히 헤매고 다니는 것과 같다'고 비유한다.  

그리고 그는 그럴 때 마다 책을 펴들었다.

나침반의 역할을 기대하며(정아은 작가는 동아줄이라는 표현을 썼다)책을 

읽고 또 읽었지만 언제나 좋은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다.

 

어떤 책을 읽고는 오히려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엄마로서의 역할에 부담이 가중되기만 했다.

어떤 때는 책에 나오는 훈육 방식을 그대로 따라했지만 제대로 먹히지 않아

'왜 나만 안 되지'하는 좌절감만 더 생기기도 했다. 

 

그래도 끊임없이 책을 찾아 나섰고 읽고 또 읽었다.

뻔한 책도 있었지만 생각의 회로를 통째로 뒤엎는 책도 있었다. 

'유레카'를 외치게 하는 책들 덕분에 잠시나마 육아의 호황기를 가졌지만 

또 다른 문제가 쉼없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때 마다 정아은 작가는 어김없이 책을 펴들었다.

 

<엄마의 독서>는 이런 경험들이 엮인 정아은 '엄마'의 이야기다.

이야기가 진솔하다. 밑바닥까지 자신을 드러낸다. 

처음 엄마가 되어 정답이 없는 미로를 헤매고 있을 여자들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통해 전달한다.

 


 

이야기의 진행 방식

 

 책의 목차마다 저자가 읽었던 책이 등장한다. 

그 책이 어떤 내용인지,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실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했는지, 등등 책과 자신의 삶을 연결시키며

이야기를 진행해나간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 중심으로 정리했다.

 


 

<역사 속의 매춘부들> _ 니키 로버츠

부제: 왜 '창남'은 없는가

 

'여성은 왜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버린 몸'이 된다.' 식의

교육을 받고 자란 저자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걸레'라는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하고 살아왔다. 

 

이 책은 여성의 성을 파헤치는 색이다.

여자를 성녀 아니면 창부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모두 남자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사고 때문에 여성들이 평생 정신 분열적인 상태에서 살게 된다고 말한다.  

'창남'은 왜 없는지 창녀라는 개념과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실생활에 커다란 힘을 미칠 수 있음을 

최초로 알게 해준 독서 경험이었다."

 


 

<엄마의 말뚝2> _ 박완서

부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선생의 작품을 그토록 즐겨 읽고 좋아했던 이유도 되짚어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현실성에 있었다. 박완서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1) 천사 같거나 (2) 엄청난 매력으로 모든 남자를 압도하는 팜 파탈이거나

(3)똑똑하고 절대로 실수를 하지 않는 커리어우먼이 아니다. 

때로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속물이고, 때로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행태를 일삼는다. 작가의 의도에 맞추어 정형화된 여성이 아니라 

실제 우리 삶에 있을 법한 '선악이 뒤섞인' 인물인 것이다."  

 

일부러 여자를 좋은 사람으로 포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할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괜찮다' 라는 뜻이다. 

'강인한 여자, 완벽하고 영웅적인 여자 캐릭터'가 환호받는 요즘 사회현상을 

생각해보면 박완서 작가가 그려내는 여성상에서 또 다른 통찰력을 얻게 된다.

 

나약한 것도 여성의 한 모습이요,

힘들 때 뒤로 빠지고 싶은 것도 여성의 한 모습이요,

실수하고 또 실수할 수도 있는 것도 여성의 한 모습이요.

곧 인간의 한 모습이다.

박완서 작가는 이를 부정하지 않고 그대로 그려낸다. 

 

조금이라도 여성을 희생적이고 나약한 모습으로 그려냈다가는 

바로 비난 받는 사회 현상을 다시, 조금은 멀리서 바라보게 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정아은 작가가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은 '현실에는 절대 있을 것 같지 않은', '가짜 같은' 인물들이었다고 말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캐릭터들이 그렇게 느껴졌는지 

예시도 들었으면 공감을 하든지 반대를 하든지 그것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됐을텐데, 

저렇게만 말하고 넘어가서 약간 찝찝함이 남아있다.

 


 

<남과 여> _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부제: 정신차리고 너부터 고쳐!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남녀 관계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에 따른 권력 변동이 어떤 양상을 띠었는지를

생물학적/인류학적/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다채롭게 조명한다.

 

"권력을 빼앗기고 남성의 말 한마디에 생사가 달린 위치로 

전락하면서 여성들은 고통스러워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른한 수동성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여성들이 수동적으로 변한 이유에 대한 대목을 다시 한번 정리하며(윗문장)

정은아 작가는 이렇게 덧붙인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복종하면서 사는 삶의 안락함.

이 부분의 의미를 너무나 잘 이해하는 나를 보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안에 그런 부분이 없었다면 그 문장을 그렇게 매끄럽게 이해하지 못했을 터. 

¨¨¨

'남자가 뭐가 어쩌네, 결혼이 뭐가 어쩌네' 하지 말고 네 모습을 봐라.

너는 '기대는 성별'이 아닌 '자립하는 성별'이 되기 위해 투철히 노력했는가?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아니, 안 그랬다.

남편이 무의식적으로 남녀 성별 분업을 행하려고 했던 것처럼, 나 또한 

내가 편리한 분야에서는 자동적으로 성별분업을 행하려 했던 것이다."

 

엄청나게 중요한 깨달음이 아닐 수 없다. 

이 질문은 그대로 나에게 돌아왔다. 

사실 나는 여성인 사람으로서 남자라는 성별이 특별나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기대는 성별'이 아닌 '자립하는 성별'로 살기 위해 노력했는지"만 놓고 본다면 

그렇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그렇게 노력했던 경험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의식하지 못했어도 분명, 여성이 더 편리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누렸을 것이다. 

 

음.. 예로 들만한 상황이 뭐가 있을까.

(1) 남자친구와 식당에 가면 내가 항상 더 편한 소파 쪽에 앉는 것.

(여러개 쓰려고 (1)을 붙였지만 당장 저것밖에 떠오르는 게 없다)

 

정신차리고 너부터 고쳐!

 


 

왜 '감정적'인 것은 여자의 영역이 되었으며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남자의 영역이 되었을까? 

 

정아은은 이렇게 답한다. 

(나에게는 중요한 발견이었기에 길어도 생략하지 않고 가져왔다.)

 

여성

"여성이 서 있는 자리는 대개 지반이 모호하다. 엄마, 딸, 며느리, 올케, 형수, 시누이, 시어머니. 

이런 자리들은 해야하는 역할의 범위와 규범이 모호하다. 여성이 맡은 일들이 대부분

공적 영역에 속하지 않고 '사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이런 영역들은 범위가 불분명하고 정해진 규범이 없기 때문에 

위반 했을 시 처벌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도 정해져 있지 않다. 각자 알아서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합의된 규범이나 관습이 없기 때문에 시어머니나 며느리, 올케가 각자 

알아서 대처해야 하고 사이가 벌어졌을 때 합의점에 도달하기도 어렵다

일하는 여성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여성은 직장에서 소수 그룹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전범이 되어줄 사례나 지지해줄 선배 집단이 부족하다. 때문에 직장의 영역에서도 

공적인 규범보다는 각개전투로 상황을 타개해야 하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남성

"물론 남자도 아빠, 아들, 사위, 처남, 형부, 매형, 시아버지 같은 가정 내 영역에서

모호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대부분 공적 영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신들이 이루는 집단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공간에 서서 공적인 규범

탄탄하게 자리잡은 위계질서를 통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해도 되는지'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갈등을 해소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과정도 자주 경험한다. 

남자가 여자보다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것은 상당 부분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갈등이나 규범을 공론화해 해결해본 경험치가 다른 것이다. 

이런 대조를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보다 '비이성적'이라든가 '감정적'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어떤 경로를 통해 그런 지점에 이르게 됐는지를 면밀히 따져보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 몇 안 되는 사람들도 어지간해서는 충분한 고찰에 이르지 못한다."

 


 

아이는 엄마의 성과물 

 

워킹맘에게나 전업주부 맘에게나 아이는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성과물'로 인식된다. 

세상에서 자기 아이를 못난 자식으로 키우고 싶은 사람이 어딨을까?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보면 그 원인을 바로 엄마에게서만 찾는 

단편적 사고방식은 이미 사회에 만연해 있다.

 

이런 문화속에서 엄마들은 더욱 악착같이 아이들을 교육 시킨다.

조금이라도 자기 아이가 지적받았을 경우 이는 곧 엄마인 자신에 대한 지적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최대한 그것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엄마와 아이 사이

 


 

<아이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았나> _ 다비드 에버하르드 

부제: '민주적인 엄마'라는 신화

 

세상의 모든 엄마는 민주적인 엄마가 되고 싶을 것이다.

아이가 떼를 쓸 때마다 화내고 소리지르는 것이 아닌,

침착하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아이에게 설명하고 합의점을 찾는 것.

현실은 다르다.

육아서를 보고 좌절감만 더욱 커져갈 때 

정아은 작가는 이 책을 발견했다. 

 

책의 일부 내용이다.

"만일 아이가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권력 남용처럼 

느껴지거나 아이를 너무 적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당신은 조만간 아이의 하인으로 전락할 것이 확실하다."

 

이 책은 매사에 아이의 의사를 물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육아 이론 신봉자들을 비판한다.

 

아이는 집안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다. 고로 권력 서열 1위다.

갓난아이 때와 달리 아이가 조금 크면 자신의 위치를 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이 생길 때 마다 자신의 서열 쿠폰을 써먹는다. 

연약하다고 해서 한없이 포용하고 보호해야 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이 다른 책들과 다른 점은 엄마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했느냐이다.

다른 육아서에는 대체로 이런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

'아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가라'

'아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아이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라'

'엄마가 된 것에 감사해라'

엄마라는 존재는 없다. 모든 것이 아이 중심이다. 

 

저자는 이 책을 읽고 '민주적인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뭐든지 엄마 탓'이라는 죄책감에서도.

 


 

<엄마됨을 후회함> _ 오나 도나스

부제: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시 엄마가 될 것인가

 

"이미지와 목차를 훑어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엄청나게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출판사에서 올린 서평의 내용 중 일부

"세상 모든 일엔 실수와 후회의 감정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했던 일이 성공적이었더라도 어느 정도는 후회하기 마련이며,

이런 양가감정에 대해 다양한 경로로 자기표현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분야, 양가감정이나 후회의 표현이 허용되지 않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엄마됨'이라는 분야다."

 

익명을 보장받은 참가자들에게 '지금의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간다면 또다시 엄마가 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대부분이 '아니요'라는 답을 내놓았다. 

사회가 모성을 신화화하고 엄마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규범을 완강하게 고수하기 때문에 

공개된 자리에서 자신의 본심을 말할 수 없었다는 고백도 덧붙였다.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과업을 잘 해낼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난다고 여겨지는데,

이러한 능력은 '모성'이라고 불린다. 엄마됨의 실상을 알게 된 여성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고 당황하지만, 이 감정을 표출하고 토로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책의 내용 중 일부

"엄마들은 한없이 이상화되고, 불가능하고, 모순된 기대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자신을 전능한 존재로 보지 않고 엄마로서의 경험을 

최고의 경험으로 여기지 않으면 한층 더 의심받는다.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난 엄마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엄마들의 반대 감정의 양립을 

심리 치료를 요하는 정신병과 연결시킨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을 명료하게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 

"일개 여성에게 한 생명의 탄생과 성장을 전격적으로 책임 지우는 사회구조의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상담 기관들은 이 모든 것을 여성의 '개인적 기질' 혹은 

'가족사에서 기원한 문제'로 취급한다는 것이다.

 

모든 엄마들이 슈퍼 파워 우먼이 아니다. 

엄마라는 개인을 치료하는 것 자체도 잘못된 방법이다. 

사회가 껴안아야 한다. 

 

이 책은 꼭 읽어보고 싶다. 

 


 

<아동의 탄생> _ 필립 아리에스

부제: 아이는 근대에 '발명'되었다

 

중세에는 아동기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

아이의 신체가 자립할 수 있을 정도만 되면 아이는 어른들과 섞여 일과 놀이를 공유했다. 

말 그대로 일어서고 걷고 말할 수 있게되면 바로 어른들의 사회에 섞여 들어갔던 것이다. 

어른들의 놀이와 아이들의 놀이가 구분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흘러 아이의 위치는 서서히 변화했다. (자세한 과정은 책을 읽어보시기를..)

연령대별로 아이들을 모아놓고 교육시키는 문화가 생겼다. 이제 아이는 훗날 

좋은 어른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잘 길러야 하는 특별한 존재로 격상되었다. 

약간 작은 어른 정도로 여겨지던 아이가 이제는 완전히 다른 종족으로 판명되어 '청소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으면서 세심한 관심과 배려를 요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아이는 어른들의 사회에서 떼어내 또래끼리 모아놓은 뒤 오직 어른이 되기 위한 

준비에만 매진시켜야 하는 존재가 되었고 어른이 되는 준비는 곧 '공부'가 되어

실제 삶과는 분리된 채 살아가게 만든다. 

그 준비를 하는 모든 과정을 전적으로 책임지기 위해 소환된 인물은 누구인가?

바로 엄마다. 

 


 

마무리

 

이 책은 엄마들만 읽어야 하는 책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엄마들만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이다. 

세상의 사회 구성원이라면 자신이 남자 또는 여자라면 (그러니까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여성이 엄마라는 역할을 처음 맡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바로 손가락질 하기 바쁘지 않았던가.

 

 한 명의 인생을, 최소 20년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교과서도 없이 전쟁 같은 외로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엄마라면 그것을 당연히 해내야 한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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