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방

할머니의 부탁

임월드 2019. 2. 15.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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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그 외삼촌하고 통화한 지가 오래됐다. 할머니가 누르면 전화가 안 가. 전화 좀 해다오.”

 

이틀 전 엄마 아빠가 모두 외출하고 난 뒤 할머니가 손녀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외삼촌한테 전화 좀 해다오. 내가 하면 전화가 안 가.”

 

이틀 후 할머니는 다시 손녀에게 부탁했다.

 

응 할머니, 번호 어디 있어?”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수첩을 꺼냈다. 종이가 누렇게 바랜, 아마 손녀보다 긴 세월을 보냈을, 작은 수첩이었다.

 

손녀는 수첩을 받고 집 전화로 번호를 누른 뒤 신호가 가는 지 확인하자마자 바로 할머니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그리고는 바로 방으로 들어왔다.

 

, 아들, 통화한 지가 오래 됐고 해서 말이야. 그래, 잘 있고?”

 

손녀는 방에 있었지만 거실에 있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안 죽고 이렇게 살아있다. 얼른 가버려야 되는데, ,, 어 그래 바쁘구나 그려.”

 

방에 있었지만 손녀는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녀는 방에 그대로 있었고 할머니는 할머니 방에서 나갈 채비를 하시고 거실로 나오셨다.

 

할머니는 늘 입으시던 하늘색 스웨터를 걸치시고 방에 있는 손녀에게 인사를 건네셨다.

 

할머니, 노인정 간다. 어이? 잘 쉬어라.”

 

. 할머니 다녀와.”

 

현관문이 닫히는 삐리릭소리가 난 뒤 손녀는 정적 속에 놓이게 되었고 어떠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잠시 후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손녀는 받지 않았다.

1분 뒤 전화가 또 걸려왔다. 손녀는 받았다.

 

여기 노인정인데, 할머니 계셔유?”

 

할머니 노인정으로 가셨어요.”

 

언제유?”

 

방금 전에요.”

 

. 알겠어유.”

 

전화가 끊기고 손녀는 방 안에 있는 베란다로 들어갔다. 베란다 창문으로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하늘색 스웨터에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로 버티시며 천천히 걸어가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손녀는 계속 지켜봤다. 손녀는 평소에도 눈물을 잘 흘렸다. 그래서 그날도 손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손녀는 그 날 오후 약속이 있어 외출을 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김영하의 에세이 랄랄라 하우스를 읽고 있었다. 단편집이라 비교적 빠르게 읽어갔다. 속도를 한참 내며 읽고 있는데 어떤 문장이 그녀의 심장을 내려앉게 했다.

 

아이들은 무리 지어 다니고, 어른들은 쌍을 지어 다닌다. 그러나 노인들은 혼자 다닌다.”

 

손녀는 그 문장에서 책을 덮어버렸다. 눈을 감아버렸지만 하늘색 스웨터의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로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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