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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 여행하는 법>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3.5

임월드 2019. 1. 2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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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서의 생각여행>

이라고 제목을 다시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의 정의

네이버 사전적 정의: 자기 거주지를 떠나 다른 고장이나 나라로 떠나는 일.

굳이 여행의 의미를 사전적 정의에 맡기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저자가 방을 여행했다고 느끼진 못했다.

 

저자는 자신의 거주지, 그것도 자신이 먹고 자는 바로 그 곳에서 여행을 했다(고 한다).

'내 방'에 있던 것은 맞으나 여행을 했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여행을 했다고 할 수도 있다. 머리속에서. 아니 사실은 그냥 생각의 흐름을 써놓은 것과 다름 없다. 위에서 말했지만 <내 방에서의 생각여행> 이 이 이 책을 제일 정확하게 표현하는 제목이 될 것이다. , 자신의 방을 탐색하기는 했다. 책상, 그림, 침대, 의자 등등.

 

하지만 자신이 오랜 세월 잠들고 깬 침대, 수도 없이 엉덩이를 뗐다 붙였다 했던 의자몇 날 며칠 지새며 집필 해왔던 책상들로부터 낯선 경험을 하기는 어렵다. 저자가 쓴 책의 내용들도 대부분 그가 평소에 해온 생각들일 것이다. 자신의 방 구조를 평소와 다른 방법으로 보기라던가 늘 아침을 깨우는 하인을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기 여행이 가지는 핵심 요소인 낯섦시도가 없다. 어쩌다 집에 40여일간 갇히게 되면 누구라도 그 안에서 온갖 망상들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 여행이라기 보다는 망상의 연속을 글에 끄적여 놓은 것에 가깝다.

 

여행이라는 키워드만 제외하면, 내용 자체는 재밌고 유쾌했다. 이런 저런 생각의 나래를 펼쳐놓은 대목들이 다채롭고 풍성했다. 특히 영혼과 동물성의 대화'에서는 삶에 대한 풍부한 사유와 통찰력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철학적인 개념들을 대화를 통해 유쾌하게 풀어낸 것에 감탄하며 읽었다.

 

 

 

가장 기분이 좋았던 장면은 하인 조아네티. 저자가 단잠에 빠져 이제 막 정신이 깰까 말까 할 무렵, 주인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조아네티. 조금이라도 더 단잠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하인에게 이것저것 할 일을 많이 시켜놓은 저자. 그 할 일 마저 다 끝낸 조아네티는 주인을 깨우려는데 못 들은 척 한다. 저자는 이것이 기쁨의 한 순간이라며 많은 사람들이 이 맛을 모른다고 얘기한다. 이 장이 나를 제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침대에 누운 주인에게 이입되어 조아네티와 밀당(?)을 하는 상상을 하니 마치 유럽의 귀족이 된 느낌이었다. 저자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더 자고 싶은 자신을 깨우는 하인과 눈치싸움을 한다, 이를 너무 재밌다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나도 최근에 단잠의 기쁨을 느낀 적이 있다. 느낀 적이 있다기 보다는 예전과 달리 요즘은 아침마다 그 기쁨을 경험한다. 일단 깨려고 할 때 집안의 잔잔한 소음이 듣기 싫지가 않다. 어느 날은 엄마 아빠의 대화(또는 언쟁)하는 소리, 어느 날은 엄마 부엌에서 칼질하는 소리, 어느 날은 윗층에서 말하는 소리 등이 단잠으로부터 나를 서서히 깨운다. 침대의 발 끝자리에 위치한 베란다 창문에서 정면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나를 기분 좋게 깨운다. 아마 이 모든것들을 그 전에도 게속 경험했을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경험들을 스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더 생생히 느끼고 간직하게 된다.

 

 

저자는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겉돌았다. (자기 입으로 책 중간중간에 얘기한다. 이러면 쿨해보이는 줄 아는가보다.)

그가 본격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내용은 영혼과 동물성’이었다. 영혼을 특히 중요시 한 것 같다. 그 둘은 어느 하나만 분리해 낼 수 없을 만큼 겹치고 섞여서 인간에 내재되어 있다고 했다. 만약 그 둘을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영혼이 동물성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덧붙이면서 인간은 영혼에 더욱 신경써야 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내가 해석한 영혼과 동물성은 이렇다.

 

영혼= 이성적 사고, 본질

동물성= 감성·감정적 사고, 속세에서의 욕망

 

동물성은 무조건적으로 나쁘게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감성, 감정, 욕망은 인간을 움직이는데 강력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이 동물성의 조련사가 되어야한다는 저자에 말에는 나도 동의한다. 인간은 동물성 앞에 매우 나약하기 때문이다. 폭발적인 에너지와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동물성이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의 방향과 조절은 영혼이 담당하는데, 영혼이 상실된 사람은 '달리는 폭주기관차'나 다름없다. 수련하지 않은 상태에선 동물성이 압도적으로 힘이 세다. 그러니 영혼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그동안 끈질기게 나의 동물성이 악을 쓰고 영혼에게 덤벼들었다. 어떤 게 영혼이고 동물성인지 헷갈릴 만큼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영혼은 인간의 가장 중심에 있지만 그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아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른다.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동물성에게 지배당할 확률이 높다. '나'라는 본질은 뒷전이고 방향을 잃은 채 사회에서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느라 바쁘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을 싫어한다. 무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에겐 무용하다 자신이란 존재에 관심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들에게 자기 자신은 언제까지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쳐지는 수단이다. 나 자신이 판단하고 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가 내리는 평가에 충족하려고, 사회가 만들어 놓은 그럴싸한 길을 가려고 열심히 달린다. 갑자기 철학 얘기를 한 것은, 영혼을 꺼내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철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왜?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 시작이 될 수 있겠다.

 

 

 

최근에 나의 동물성과 영혼이 화해의 악수를 했다. 덕분에 내 마음의 동요도 가라앉고 인생의 기로에서 큰 용기가 필요했던 선택도 과감히했다. 영혼에 한 발 다가간 것이다.

언제 또 영혼은 저만치 숨어버리고 동물성이 활개치고 다닐지 모르는 일이다. 본질을 바라보려는 꾸준한 노력없이 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동안 이성과 감성으로만 표현하기에 뭔가 2% 부족했는데, 영혼과 동물성이라는 더욱 폭 넓게 아우르는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이 책에서 다른 건 다 까먹어도 이것 하나는 영원히 남을 것 같다. 

영혼과 동물성의 상생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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