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문학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3.0

임월드 2019. 3. 17. 01:40
반응형

 

저절로 두 번 읽게 되는 책과, 두 번 읽어야만 이해되는 책이 있다.

 

 

내 기준으로 이 책은 후자다. <연애의 기억>은 전자였다.

나는 왠지 전자에 더 마음이 간다.

<연애의 기억>은 다 읽고 난 후 .. 뭐지?’하며 홀리듯 첫 장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지만,

이번 책은 처음부터 다시 읽을 수밖에 없도록 노골적으로 장치를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놓고 자 이해가 잘 안 되지? 두 번 안 읽었구만이러는 느낌.

 

 

메인 스토리

 

 

아마 이 소설을 읽고 서평을 남긴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빼지 않고 이 주제에 대해 다뤘을 것이다.

 [주인공 토니가 자신의 전 여친과 에이드리언(주인공 절친)이 사귀게 된 것을 알고

그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주인공은 그 일을 새까맣게 잊고 살다가

노년이 되어 그 편지가 자신에게조차 충격적일 정도로

 심한 욕과 저주를 퍼부은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주변 인물과 그들의 관계를

얼마나 자신의 입맛대로 평가해왔는지를 깨닫는다.]

 

 

이게 스토리의 반전이자 큰 주제인데, 내게는 그렇게 커다란 충격이 아니었다.

 별로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나도 모르게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준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어요.”

와 같은 서평을 제일 많이 본 것 같은데,

이 책은 단순히 그렇게만 끝낼 책이 아니다.

 

 

나의 뇌를 계속 파고들었던 자살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자살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했어.”

친구들이 롭슨의 자살에 대해 얘기하는 와중에 에이드리언 핀이 꺼낸 말이다.

며칠 전에 읽었던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유시민 작가가 삶과 죽음에 대해 얘기하며

카뮈의 실존주의를 언급한 것이 생각이 났다.

 여기에 카뮈의 말이 더 자세하게 나와 있다.

 

 

참으로 중대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

이것이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 세계는 삼차원을 가지고 있는가,

정신은 아홉 개 또는 열두 개의 범주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이후의 일이다. 그것들은 장난이다.”

 

 

이제 카뮈가 왜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했는지 이해가 조금은 간다.

 동물은 스스로의 삶이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것들에게 주어진 욕구가 잘못된 것인지, 혹시 과한 것은 아닌지 고민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그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그것들만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다 죽는다.

그런 의미에서 자살이라는 것은 매우 철학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의미가 없는 삶은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말한다.

삶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할 때, 미래에도 그 가망을 보지 못할 때

인간은 더 이상 생존하지 않기를 택한다.

 

 

이 책에서는 두 사람이 자살을 한다.

앞에 잠깐 등장하는 롭슨은 초등학교 6학년의 나이에

여자를 임신시키고 자살한.(고 루머로 돌아다니지만 주인공과 친구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롭슨이 한 선택은 과연 어떤 철학적 가치가 있는 걸까?

주인공인 에이드리언의 자살은 어떤 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에이드리언의 자살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하고 난 직후 토니는 그의 자살을 ‘1등급자살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가 자살하며 남긴 유언이 평소에 토니가 존경하던

에이드리언의 딱 그 모습을 충족시켜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유언을 토니가 말한다.

 

 

그는 삶이 바란 적도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 부분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논지가 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이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이 이 글을 다시 본다면, 기가 찰 것이다.

이드리언은 인생에 대한 심층적 연구와 본질을 뚫는 통찰력으로 내린 결론 때문에 자살을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사유하는 자라고 칭하며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얘기했지만

그가 자살한 이유는 가타부타 할 것 없이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임신시켰기 때문이다.

 노산으로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났고 에이드리언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선택 vs 도피

 

 

카뮈는 자살이 철학적 문제인 이유는 삶의 가치를 묻고 본질에 답하려는 행위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철학적인 행위라고 해서 그에 따른 행동도 의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에이드리언의 자살을 둘로 나누고 싶다.

선택은 처음에 그가 유서에 남긴 대로 사유하는 자로서의 자살이다.

도피는 나중에 밝혀진 늙은 여자를 임신시킨 죄책감으로 저지른 자살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부류든 자살은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능성 원천봉쇄이다.

 

선택과 도피의 자살 모두 최선의 선택이 아님을

내 나름의 근거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선택하는 자살

 

만약 그가 진정 삶에 딸린 모든 조건을 시험할생각이었다면

 자살은 제일 나중에 선택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스스로를 진정 사유 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자신의 생각이 전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오만한 사람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자살을 한 이후에는 어떤 사유도, 그에 따른 변화의 가능성도 없다.

 언제라도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알고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자살이라는 오만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인간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자살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도피하는 자살

 

아마 선택적 자살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피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살을 한다.

그들은 사실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에이드리언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었다.

 살아가지 않기를 택한 것이 아니라 살 수가 없었다.

에이드리언은 여자친구 엄마를 임신시켜 놓고 더 이상 그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의 선택은 최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그렇게 늙은 여자와 여자친구와 장애아를 남겨 놨다.

모든 고통의 몫이 남겨진 자에게 돌아갔다.

 남겨진 사람은 에이드리언과의 미래,

그 미래가 어떤 쪽이든 일말의 가능성도 꿈꾸지 못하게 되었다.

 

 

내게 남긴 것

 

스토리 자체에서 내게 크게 와 닿은 것은 없었다.

이 책에서 내가 건진 것은 자살에 대한 고찰이다.

일평생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다, 앞으로도 안 할 것 같지만.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삶과 연결하게 된다.

나는 무턱대고 들이대는 이상주의자는 아니지만,

삶에서 최대한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은 사람이다.

내가 죽기 전까지 가능성은 열려있다.

 

'살고 싶지 않은' 삶을 만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