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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프란츠카프카 3.9

임월드 2019. 3. 13.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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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강렬했다.

 

 

 

주인공 그레고르가 잠에서 깨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한 것을 알아차린다.

정확히 바퀴벌레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갈색 몸통에 배가 둥글고 다리가 얇고 많은 것으로 보아 자연스럽게 바퀴벌레를 떠올리게 되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바퀴벌레를 연상하며 읽었을 것이다.

 

 

이야기 상 살짝 이해가 안 됐던 것은

회사 상사가 직접 찾아왔던 일이었다.

말단 영업 직원이 결근을 한다고 상사가 집까지 손수 찾아오는 정성이라니.

아무래도 전화가 없어서

(카프카가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14년이고

1915년에 미국에서 이루어진 전화통화가 대대적인 이벤트였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읽는 내내 그레고르에게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읽는 내내 슬프다.

그러나 이야기는 굉장히 박진감있게 흘러간다.

 언제 이 흉측한 괴물이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올지,

어머니는 벌레로 변한 아들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여동생의 오빠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할지,

 그레고르가 어떤 충동적인 일을 벌일지,

뒤의 내용이 계속 궁금해서 읽는 속도도 더 빨라진다.

이야기는 흥미진진한데 느끼는 감정은 슬프다니, 모순이긴 하다.

슬픈 이야기는 왠지 서사의 흐름이 느리고 조용하며 정적이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아무튼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레고르를 챙기고 돌본 사람도 여동생이었지만 그를 결국에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도 여동생이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여동생이 벌레가 된 오빠가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도록 가구를 치우는 부분이었다.

(카프카의 기발하고 재밌는 상상력에 대한 감탄했다.)

 여동생이 만약 육체는 벌레지만 정신은 그대로라고 생각했으면

오빠의 평생 추억이 담겨있는 가구를 치웠을까?

 여동생의 가구를 치워야 한다는 발언은

오빠를 완전한 벌레로 보기 시작했다는 선언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어머니는 가구를 치우기를 꺼려했다.

 그레고르는 이에 반대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가구를 다 치우면 방이 너무 공허해질까 아들을 걱정했다.

어머니는 그레고르를 사람으로 본 것이다.

그레고르는 액자만은 치우지 않기를 바라며 자신의 몸통으로 액자를 사수했지만

 여동생은 그가 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에는 관심 없고

 단지 어머니를 놀라게 한 것, 자신에게 징그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 때문에 화를 낸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여동생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그레고르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동생이 한 말 중에 이 말이 그레고르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저게 오빠라면, 사람이 저렇게 흉측한 벌레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쯤은

 알아차리고 진작 제 발로 나갔을 거에요.”

 

 

 자신이 사람이라면 방에 저렇게 남아 가족들을 힘들게 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여동생의 발언은

그레고르의 가슴을 처참하게 후벼팠을 것이다.

그레고르의 정체성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더 이상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가장 오빠를 잘 이해해주던 여동생이,

유일하게 벌레로 변한 오빠의 방에 용기 있게 들어오고 챙겨주던 여동생이

그레고르의 죽음의 불씨가 되었다.

 그녀의 꿈을 유일하게 응원하고 지지해준 사람은 그레고르였다.

여동생의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 그레고르는 열심히 돈을 벌며 자신만의 계획을 세웠다.

 그만큼 자신에게 소중한 여동생이 고통 받고 있는 모습에 죽음을 택하지 않았나 싶다.

 

 

읽는 동안 그레고르가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나의 작은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레고르는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로 가득 찬 자신의 방에서

마지막 숨결을 내뱉으며 그대로 생을 마무리했다.

 

 

어쨌든 삶을 계속 살아야하는 가족들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레고르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당연히 자신을 벌레로만 취급하고 방에 한 번 들어오지도 않는 엄마, 아빠가 매우 미울 것이다.

하지만 반대 입장이라면?

(참고로 나는 바퀴벌레를 무지 무지 무서워하고 혐오한다.)

 여동생만큼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 나는 가족들이 의사소통을 시도조차 안 해본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나라면 의사소통이 가능한지 제일 먼저 테스트 했을 것이다.

내 말을 알아들으면 더듬이를 움직여봐!”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는 벌레인가 사람인가?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한 번 쯤 할 것이다.

신선한 음식에는 관심 없고 썩은 음식이나 찌꺼기를 좋아하는 벌레의 식성을 갖고 있지만

그레고르는 생각하고 듣고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감상한다.

아무래도 벌레라고 나는 말 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그가 벌레인지 사람인지 정의 내리는 것은 무의미한 짓일 수도 있다.

 그가 벌레이건 아니건, 중요한 것은

 그를 계속 가족의 구성원으로 데리고 살 것인가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소설 속의 인물들을 가볍게 탓하지만은 못할 것이다.

 

 

결말이 너무 슬프다.

 하지만 가장 현실적으로 일어날 법한 이야기다.

아니, 현실은 더 한 법이다. 이보다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소설의 결말이 오히려 위로가 되는 느낌이다.

 

 

<변신> 바로 다음에 <선고>가 기다리고 있다.

<변신>으로 이 단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

 또 어떤 짧고 강렬한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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